2011년 10월 15일
Chapter 2. Meaning of the Step - Nun in Hesitation
1. 완연한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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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도래해서 그런지 일교차가 크네요.”
성당이 잿더미로 변하고, 원인이 무엇인지 모를 화재로 뉴스에 실린 그날로부터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그동안 레그나의 금력에 힘입어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할 만큼, 그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말았다. 만약에 나 혼자였다면 하루 여행거리에 성당을 사이에 둔, 그 사이의 좁은 지역만이 내 여행 아닌 여행이었을 텐데. 레그나 덕분에 새로운 것들을(굳이 따지자면 변화한 것이겠지만) 많이 접할 수 있는 소중한 여행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는 우린 사실 유동인구로 몸 가누기가 힘들 정도인 번화가 한복판에 서 있다.
“그렇군. 계절이 한순간에 찾아온 것만 같다.”
“여긴 사람이 많아서 그나마 나은 걸지도 몰라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간다면 분명 더 추울걸요?”
“나는 괜찮겠지만. 너는 좀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는 나를 위아래로 유심히 한번 훑어보며 말했다.
그 잠깐 사이에 이 시대에서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사라져버린 인종차별(뱀파이어와 인간을 비교하는데 인종이라는 단어를 쓰긴 힘들겠지만)을 온몸으로 느낀 건 착각일 것이다.
사실 번화가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종교인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내 직업의 특성상 가끔씩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을 위해 모두의 앞에서 말을 할 때도 있지만, 그때는 순수하게 가톨릭 신자들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내 종교적 신념을 설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때에는 다르다고 할까. 여하튼, 다르다.
일반인처럼 다니고 싶은데 마땅히 입을 옷도 없고. 레그나의 금력을 빌려 옷을 사자니, 수녀 복을 입고 그런 옷(별 것 아니다. 다만 꽃다운 스무 살의 소녀들이 입는 옷)을 산다는 것이 조금 민망하기도 해서 관뒀다.
우리에게로 시선이 자꾸만 몰린다. 심지어는
찰칵, 스마일…….
대놓고 촬영과 사진까지 찍어가서 부끄러워서 무신경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조-금(정말 조금이다. 아직도 익숙하다고 말하기엔 솔직히 무리가 있다) 익숙해졌을 뿐이다. 게다가 우리가 반응할수록 이상하게도 반응이 더 뜨거워져서 무심해지지 않으려 할 수가 없을 정도다.
‘왜 우리들에게 주목하는 걸까.’
혹시 신부&수녀라는 설정으로 도심 한복판에서의 코스프레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이보다 더 과감한 연출을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 것이란 게 내 주관적인 판단이기도 하고. 게다가 우린,
‘서양 신부와 동양 수녀라는 건 더 볼 수 없는 설정이지.’
대한민국 최대의 눈요깃거리. 외국인이란 존재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간에 외국인이 지나가면 한번은 꼭 바라보는 것이 한국인이니까. 더더욱 할리우드 배우라고 생각할 만큼 외모도 충실히 갖추고 있는 레그나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파의 이목 속에서 며칠을 지내다보니 필연적으로 시선이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위는 그에 대한 막무가내에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한 이유고. 다만 익숙해져도 적응이 된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주 가끔씩(누구는 ‘자주’라고도 표현한다) 사람들을 의식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래서 말인데, 카디건 하나만 사주면 안 돼요?”
레그나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부탁하는 건 미안하지만. 불편한 점들을 숨기고 있으면 언제 발목을 잡을지 몰라서 솔직하게 실토했다.
일부러 그를 옷 가게가 많은 지하상가로 이끌고 내려가며 말을 했다. 착한 수녀의 간절한 부탁이기도 해서 보통의 동행자는 들어줄 법도 한데, 이 동행자는 너무 이성적이라서 대답이 걱정된다.
“음…….”
거봐라, 망설이고 있다.
양팔을 펄럭이며, 자연스럽게 걸어 내려가는 레그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돈을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라는 갈등의 기로에 놓여있을 땐 항상 이런 표정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Yes가 떨어지길.
“하는 수 없군.”
성공!,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본격적으로 카디건을 물색했다. 지나가며 유리에 비친 활짝 핀 내 모습을 보며 한껏 더 고무되는 나였고, 반대로 그는 무표정에서 어딘가 바뀐 듯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수녀 복에 어울릴 법한 보라색과 틈틈이 흰 줄무늬가 섞인 카디건을 샀다.
지하상가를 빠져나왔을 땐 이미 어둑어둑했다.
이렇게 빨리 어두워질 줄 몰랐던 나로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재빠른 레그나의 대처로(매우 능숙하게 아무런 사람들에게 가까운 성당의 위치를 물어봤다) 성당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
“잘자요.”
“너도, 잘자라.”
이번엔 내가 침대 위, 그가 간이용 침대에 누운, 성당에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곳을 관장하고 계시는 신부님께서 레이디 퍼스트를 강조하셨기 때문인 것이 아주 큰 힘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눈부신 햇살이 잠을 깨웠다. 최근에는 수녀의 생활보다는 일반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해왔기에 꽤나 늦은 아침에 몸이 반응했다.
‘나도 많이 나태해졌는걸.’
며칠 안했다고 몇 년간 쌓아온 습관을 유지하지 못하다니. 편함이란 유혹은 꽤 많이 강한가 보다.
반성도 잠시, 눈비비고 일어났다. 이어지는 기지개 펴기.
“으아 - 암.”
뭔가 뽀독뽀독 소리가 몸속에서 울리며 구석구석 스며있는 잠기운을 떨쳐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돌아보니 뭔가가 부족하다. 아주 크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레그나가 없네.’
침대도 깔끔히 접혀있는 것을 보니 이미 깨어났나 보다. 커튼을 걷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햇볕이 스미는 걸 보니, 햇볕을 피해서 어딘가에 숨어 계속해서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엄연한 뱀파이어니까.’
뱀파이어에 관한 상식(뱀파이어는 밤에 활동한다. 햇볕에 있으면 타 죽는다. 십자가를 무서워한다. 마늘을 싫어한다. 등등 그 많은 것들)을 완전히 무너뜨린 장본인이 레그나여서 상식을 곧잘 잊곤 한다. 그래도 그는 엄연한 뱀파이어다. 다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성이 강하다, 라고 짐작할 뿐이고. 아직 물어보진 못했다. 양파처럼 벗겨도 끝이 없는 레그나여서 물어볼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막상 그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들은 없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인간 같으니까.
레그나가 어디 있든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선 씻기로 했다.
세면장 그 안에 레그나는 이를 닦는 선객이었다. 하지만 이를 닦는다는 표현을 쓰기엔 어울리지 않는 도구들이 있기에 이 표현은 살짝 애매하기도 하다.
이를 닦는 뱀파이어. 머릿속에 이미지 구상이 힘들 수도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레그나라는 뱀파이어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라, 함부로 놀릴 순 없다. 이를 닦는 표정하나는 전쟁하는 이의 결심과 다를 것 없는 진지함이 묻어나오기 때문에,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거짓말을 모르는 성격이니까.’
선의의 거짓말도 이성적인 사람의 교양이 될 수 있겠지만, 유독 거짓말은 하지 않는 레그나다. 오히려 독설을 해야 한다, 랄까.
어쨌든 며칠 전 성당을 떠나고 처음 같이 동숙한 아침. 이 닦는 그의 모습이 신기해서 물어봤었다.
그는 이를 닦음으로써 아침부터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유지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장비들은 밤에 능력이 극대화되는 뱀파이어의 특성상 순식간에 생겨버리는 송곳니를 무디게 하는 용도로 쓰인다. 그는 이렇게 세상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사소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착한 뱀파이어다.
‘그도 한때 인간이라고 했으니까.’
“오늘부터는 뭘 할까요?”
칫솔에 치약을 듬뿍 짜며 말했다.
“?”
알아서 하라는 것인가? 난 눈빛으로 말하는 건 자신 없는데.
“시내에 돌아다니는 건 충분하니까. 더 이상은 무의미 한 것 같은데. 혹시 모를…… 아니다.”
“……?(우물우물)”
말실수를 덮으려고 재빨리 칫솔질을 시작했다. 그도 낌새를 눈치 채고 거울 속 시선을 내게로 고정시켰다. 거울을 깰 듯, 강렬한 눈빛. 분명 왜 말하다 멈추느냐, 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눈빛으로 말해요, 란 이런 것인가!’
뭔가 진지함에 반응해야 할 텐데 이상한 곳에서 반응하고 말았다.
사실 이렇게 평온한 나날에 혹시 시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관둔 것이다. 내겐 이 평온한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하단 걸 잊기엔 아직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다.
“묻지 마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째려봐도 이야기 안 해줄 거예요. 차라리 마음을 읽어요 그게 편하니까.”
그 뒤로 씻는 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독심술을 써서 내 마음을 읽고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지만.
‘설마.’
뱀파이어&천사&인간. 천사로서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뱀파이어 같은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고. 인간인 것 같은 행동을 하긴 하지만, 이상한 마법이나 부리고. 덕분에 그를 보면 사람에게서 상상하지 못한 생각을(흔히들 판타지라 부른다는 그것) 할 수 있다.
끔찍한 생각 때문에 꽤 불편한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성당에서 당분간 머물러도 될까요?”
신부 두명에 수녀 한명이서 나누는 조촐한 식사. 그 사이에서 레그나의 동의도 없이 이곳 신부님께 여쭈어 보았다.
탈모가 아닌 흰머리가 인상적인. 나이가 제법 든 신부님이었다.
이런 곳이야 말로 내가 도와주어야 하는 성당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물러 보고 싶은 곳이다.
“이런 누추한 곳에는 왜 머물려고 하시나?”
특유의 나긋하고 길게 내빼는 말투에서, 이미 별이 되어버린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쳤다.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누구는 감(感) 때문이라는 아주 적절한 이유로 날 데려오지 않았는가.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레그나는 내 의견이 흥미롭다는 듯 묵묵히 식사하며 날 바라볼 뿐이다.
“젊은이들이 있기엔 누추하지 않나 싶네.”
“잘 수 있고, 밥 먹을 수 있고, 수녀로서도 있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괜찮아요.”
이 성당은 사람들의 접근성도 용이한 곳에 위치한 터라 작지만 많은 사람들이 올 것만 같다.
‘활기찬 성당이라…….’
전보다 의욕있는 수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까지 있고 싶다면 나로서는 더는 말리지 않겠네. 환영하네.”
딱히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은 채 신부님은 우리들을 받아주었다.
‘화이팅!’
자그마하게 파이팅 포즈로 의기투합하며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 by | 2011/10/15 13:41 | Vampire & Sister | 트랙백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