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Meaning of the Step - Nun in Hesitation

1. 완연한 가을이 왔다.

 

“가을이 도래해서 그런지 일교차가 크네요.”

성당이 잿더미로 변하고, 원인이 무엇인지 모를 화재로 뉴스에 실린 그날로부터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그동안 레그나의 금력에 힘입어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할 만큼, 그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말았다. 만약에 나 혼자였다면 하루 여행거리에 성당을 사이에 둔, 그 사이의 좁은 지역만이 내 여행 아닌 여행이었을 텐데. 레그나 덕분에 새로운 것들을(굳이 따지자면 변화한 것이겠지만) 많이 접할 수 있는 소중한 여행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는 우린 사실 유동인구로 몸 가누기가 힘들 정도인 번화가 한복판에 서 있다.

“그렇군. 계절이 한순간에 찾아온 것만 같다.”

“여긴 사람이 많아서 그나마 나은 걸지도 몰라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간다면 분명 더 추울걸요?”

“나는 괜찮겠지만. 너는 좀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는 나를 위아래로 유심히 한번 훑어보며 말했다.

그 잠깐 사이에 이 시대에서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사라져버린 인종차별(뱀파이어와 인간을 비교하는데 인종이라는 단어를 쓰긴 힘들겠지만)을 온몸으로 느낀 건 착각일 것이다.

 

사실 번화가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종교인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내 직업의 특성상 가끔씩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을 위해 모두의 앞에서 말을 할 때도 있지만, 그때는 순수하게 가톨릭 신자들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내 종교적 신념을 설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때에는 다르다고 할까. 여하튼, 다르다.

일반인처럼 다니고 싶은데 마땅히 입을 옷도 없고. 레그나의 금력을 빌려 옷을 사자니, 수녀 복을 입고 그런 옷(별 것 아니다. 다만 꽃다운 스무 살의 소녀들이 입는 옷)을 산다는 것이 조금 민망하기도 해서 관뒀다.

우리에게로 시선이 자꾸만 몰린다. 심지어는

찰칵, 스마일…….

대놓고 촬영과 사진까지 찍어가서 부끄러워서 무신경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에 와서는 조-금(정말 조금이다. 아직도 익숙하다고 말하기엔 솔직히 무리가 있다) 익숙해졌을 뿐이다. 게다가 우리가 반응할수록 이상하게도 반응이 더 뜨거워져서 무심해지지 않으려 할 수가 없을 정도다.

‘왜 우리들에게 주목하는 걸까.’

혹시 신부&수녀라는 설정으로 도심 한복판에서의 코스프레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이보다 더 과감한 연출을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 것이란 게 내 주관적인 판단이기도 하고. 게다가 우린,

‘서양 신부와 동양 수녀라는 건 더 볼 수 없는 설정이지.’

대한민국 최대의 눈요깃거리. 외국인이란 존재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간에 외국인이 지나가면 한번은 꼭 바라보는 것이 한국인이니까. 더더욱 할리우드 배우라고 생각할 만큼 외모도 충실히 갖추고 있는 레그나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파의 이목 속에서 며칠을 지내다보니 필연적으로 시선이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위는 그에 대한 막무가내에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한 이유고. 다만 익숙해져도 적응이 된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주 가끔씩(누구는 ‘자주’라고도 표현한다) 사람들을 의식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래서 말인데, 카디건 하나만 사주면 안 돼요?”

레그나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부탁하는 건 미안하지만. 불편한 점들을 숨기고 있으면 언제 발목을 잡을지 몰라서 솔직하게 실토했다.

일부러 그를 옷 가게가 많은 지하상가로 이끌고 내려가며 말을 했다. 착한 수녀의 간절한 부탁이기도 해서 보통의 동행자는 들어줄 법도 한데, 이 동행자는 너무 이성적이라서 대답이 걱정된다.

“음…….”

거봐라, 망설이고 있다.

양팔을 펄럭이며, 자연스럽게 걸어 내려가는 레그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돈을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라는 갈등의 기로에 놓여있을 땐 항상 이런 표정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Yes가 떨어지길.

“하는 수 없군.”

성공!,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본격적으로 카디건을 물색했다. 지나가며 유리에 비친 활짝 핀 내 모습을 보며 한껏 더 고무되는 나였고, 반대로 그는 무표정에서 어딘가 바뀐 듯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수녀 복에 어울릴 법한 보라색과 틈틈이 흰 줄무늬가 섞인 카디건을 샀다.

 

지하상가를 빠져나왔을 땐 이미 어둑어둑했다.

이렇게 빨리 어두워질 줄 몰랐던 나로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재빠른 레그나의 대처로(매우 능숙하게 아무런 사람들에게 가까운 성당의 위치를 물어봤다) 성당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

“잘자요.”

“너도, 잘자라.”

이번엔 내가 침대 위, 그가 간이용 침대에 누운, 성당에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곳을 관장하고 계시는 신부님께서 레이디 퍼스트를 강조하셨기 때문인 것이 아주 큰 힘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눈부신 햇살이 잠을 깨웠다. 최근에는 수녀의 생활보다는 일반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해왔기에 꽤나 늦은 아침에 몸이 반응했다.

‘나도 많이 나태해졌는걸.’

며칠 안했다고 몇 년간 쌓아온 습관을 유지하지 못하다니. 편함이란 유혹은 꽤 많이 강한가 보다.

반성도 잠시, 눈비비고 일어났다. 이어지는 기지개 펴기.

“으아 - 암.”

뭔가 뽀독뽀독 소리가 몸속에서 울리며 구석구석 스며있는 잠기운을 떨쳐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돌아보니 뭔가가 부족하다. 아주 크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레그나가 없네.’

침대도 깔끔히 접혀있는 것을 보니 이미 깨어났나 보다. 커튼을 걷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햇볕이 스미는 걸 보니, 햇볕을 피해서 어딘가에 숨어 계속해서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엄연한 뱀파이어니까.’

뱀파이어에 관한 상식(뱀파이어는 밤에 활동한다. 햇볕에 있으면 타 죽는다. 십자가를 무서워한다. 마늘을 싫어한다. 등등 그 많은 것들)을 완전히 무너뜨린 장본인이 레그나여서 상식을 곧잘 잊곤 한다. 그래도 그는 엄연한 뱀파이어다. 다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성이 강하다, 라고 짐작할 뿐이고. 아직 물어보진 못했다. 양파처럼 벗겨도 끝이 없는 레그나여서 물어볼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막상 그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들은 없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인간 같으니까.

레그나가 어디 있든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선 씻기로 했다.

세면장 그 안에 레그나는 이를 닦는 선객이었다. 하지만 이를 닦는다는 표현을 쓰기엔 어울리지 않는 도구들이 있기에 이 표현은 살짝 애매하기도 하다.

이를 닦는 뱀파이어. 머릿속에 이미지 구상이 힘들 수도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레그나라는 뱀파이어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라, 함부로 놀릴 순 없다. 이를 닦는 표정하나는 전쟁하는 이의 결심과 다를 것 없는 진지함이 묻어나오기 때문에,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거짓말을 모르는 성격이니까.’

선의의 거짓말도 이성적인 사람의 교양이 될 수 있겠지만, 유독 거짓말은 하지 않는 레그나다. 오히려 독설을 해야 한다, 랄까.

어쨌든 며칠 전 성당을 떠나고 처음 같이 동숙한 아침. 이 닦는 그의 모습이 신기해서 물어봤었다.

그는 이를 닦음으로써 아침부터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유지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장비들은 밤에 능력이 극대화되는 뱀파이어의 특성상 순식간에 생겨버리는 송곳니를 무디게 하는 용도로 쓰인다. 그는 이렇게 세상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사소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착한 뱀파이어다.

‘그도 한때 인간이라고 했으니까.’

“오늘부터는 뭘 할까요?”

칫솔에 치약을 듬뿍 짜며 말했다.

“?”

알아서 하라는 것인가? 난 눈빛으로 말하는 건 자신 없는데.

“시내에 돌아다니는 건 충분하니까. 더 이상은 무의미 한 것 같은데. 혹시 모를…… 아니다.”

“……?(우물우물)”

말실수를 덮으려고 재빨리 칫솔질을 시작했다. 그도 낌새를 눈치 채고 거울 속 시선을 내게로 고정시켰다. 거울을 깰 듯, 강렬한 눈빛. 분명 왜 말하다 멈추느냐, 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눈빛으로 말해요, 란 이런 것인가!’

뭔가 진지함에 반응해야 할 텐데 이상한 곳에서 반응하고 말았다.

사실 이렇게 평온한 나날에 혹시 시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관둔 것이다. 내겐 이 평온한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하단 걸 잊기엔 아직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다.

“묻지 마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째려봐도 이야기 안 해줄 거예요. 차라리 마음을 읽어요 그게 편하니까.”

그 뒤로 씻는 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독심술을 써서 내 마음을 읽고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지만.

‘설마.’

뱀파이어&천사&인간. 천사로서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뱀파이어 같은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고. 인간인 것 같은 행동을 하긴 하지만, 이상한 마법이나 부리고. 덕분에 그를 보면 사람에게서 상상하지 못한 생각을(흔히들 판타지라 부른다는 그것) 할 수 있다.

 

끔찍한 생각 때문에 꽤 불편한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성당에서 당분간 머물러도 될까요?”

신부 두명에 수녀 한명이서 나누는 조촐한 식사. 그 사이에서 레그나의 동의도 없이 이곳 신부님께 여쭈어 보았다.

탈모가 아닌 흰머리가 인상적인. 나이가 제법 든 신부님이었다.

이런 곳이야 말로 내가 도와주어야 하는 성당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물러 보고 싶은 곳이다.

“이런 누추한 곳에는 왜 머물려고 하시나?”

특유의 나긋하고 길게 내빼는 말투에서, 이미 별이 되어버린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쳤다.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누구는 감(感) 때문이라는 아주 적절한 이유로 날 데려오지 않았는가.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레그나는 내 의견이 흥미롭다는 듯 묵묵히 식사하며 날 바라볼 뿐이다.

“젊은이들이 있기엔 누추하지 않나 싶네.”

“잘 수 있고, 밥 먹을 수 있고, 수녀로서도 있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괜찮아요.”

이 성당은 사람들의 접근성도 용이한 곳에 위치한 터라 작지만 많은 사람들이 올 것만 같다.

‘활기찬 성당이라…….’

전보다 의욕있는 수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까지 있고 싶다면 나로서는 더는 말리지 않겠네. 환영하네.”

딱히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은 채 신부님은 우리들을 받아주었다.

‘화이팅!’

자그마하게 파이팅 포즈로 의기투합하며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by 화희 | 2011/10/15 13:41 | Vampire & Sister | 트랙백 | 덧글(0)

3

3.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몇 개월째 머물고 있던 성당을 잠깐 사이의 결심으로 떠난다는 건. 참 고민이 많이 생기는 일이다. 하지만 나에겐 머무는 기간이 몇 개월이든, 며칠이든 간에 짐 꾸리는 일은 쉬운 일이다.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수행 수녀의 특성상, 머문 곳 어딘가에 흔적을 남길지언정 체류 기간이 길다고 해서 짐을 늘리진 않기 때문이다.

여행용 가방 안에 차곡차곡 옷가지들과 여러 생필품을 담고 있던 도중 레그나가 갑작스레 말을 걸어왔다.

“시스터,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나?”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저 내가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네?” 생각지도 못했다.

“같이 떠나자고 했다.”

특별한 일 없이 친구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말하는 억양으로, 그는 나에게 재차 말했다.

“왜 그러시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이와 동행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이야기다. 거기다 이 천사는 뱀파이어이기도 하고 도시에서 막무가내로 총격전까지 벌이는 천사니까.

“딱히 이유는 없어. 그저 감(感)이란 중요한 거니까.”

뜻밖의, 참으로 대단한 이유였다.

“좋아요. 같이 가도록 해요. 떠돌이 수녀생활도 색다르게 해볼 수 있겠네요.”

쾌활하게 승낙했다. 그가 감(感)을 따진다면, 난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이 사람과 함께 해도 괜찮을 거라고. 마음이 속삭였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말도록. 너만 준비되면 언제든지 출발할 테니.”

인간을 넘어서 천사에 가까운 존재라서 그런지 그는 아무것도 필요 없나 보다. 다만,

“레그나.”

“왜 그러나?”

“그래도 옷은 갈아입도록 하죠. 그 옷으로 혼자 다니는 건 상관없겠지만, 이젠 둘이라구요. 서로를 위해서 신경 쓸 건 써야죠.”

그의 옷은 여전히 누더기 같은 정장이었다. 그것도 피로 된 얼룩이 덕지덕지 낀.

“미안한 일이지만 난 여벌의 옷이 없다. 필요한 건 그때그때 구했으니까.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구해오지.”

대한민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정상적 경로로는 구할 수도 없는) 자동식 리볼버는 가지고 있으면서.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옷가지는 없다니. 아이러닉, 그 자체다.

하긴, 어젯밤까지 쫓기던 사람이 여벌의 옷을 들고 다니는 것도 웃음이 나올법한 일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구해온다는 건지. 아직 상가의 가게들은 개점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의 어조에는 반드시 해낸다는 자신감이 서려 있다.

“설마 훔쳐올 건가요?”

그라면 가능하다. 눈으로 쫓고 있어도 따라가기 힘든 속도를 내는 그라면. 시내에서 총도 쏘는 사람인데 이정도야 못할까 싶다.

생각해 보니 물어보나마나 뻔히 보이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정말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 하하…….”

막상 대답을 듣고 나니 어이가 없다.

“……가 아니잖아!”

뒤늦은 딴죽걸기였다.

“수녀랑 같이 다니자고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면서! 뱀파이에어, 도망자에, 이젠 도둑놈까지 되려고 하다니! 같이 가자고 해놓고! 수녀와 다니려면 그에 걸 맞는 행동을 보여 달란 말이에요!”

인간보다 한없이 이성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이성적인(제정신의) 현대인으로서 하기 힘든(우발적이면 가능할까?) 일을 서슴없이 하려고 하는 레그나의 이중적인 모습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그때 문뜩 떠오르는 생각.

천사&뱀파이어&인간.

이 세 가지 부류의 틈에서 인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변덕적인 성향을 가져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아, 미안하다. 지금의 문명에선 동행인을 만들지 않았거든. 네가 처음이다. 이서현.”

멍──.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가 잠들기 전에 한마디 말한 것뿐인데, 그는 기억해주었다. 내심 속으로 들었나, 못 들었나,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들었는데 다시 물어보면 민망하고, 하는 고민 때문에. 더더욱 알게 모르게 신경 쓰였다.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론 감동, 또 감동이다.

“이름 기억하고 불러준 건 정말, 정말 고맙지만. 훔치는 건 그래도 안 돼요.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을 비꼬면 뭔가 성립될 듯 논리가 생길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안 돼요.”

말을 해놓고 잠깐 우리의 대화에 대해 생각해봤다. 떠날 채비를 하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 제 삼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광경 만담에서나 볼 법한 상황인 것 같지 않은가.

“뭐가 그리 즐겁지?”

“그냥요.”

웃음에 이유가 꼭 필요한 것만은 아니니까.

“날 말리는 건 이해하겠다만. 그렇다면 이에 따른 해결방안은 있는 것인가? 시스터 서현?”

이 사람 좋은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안 좋은 구석도 있다. 너무 이성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사무적, 냉혈한 뭐 그런 쪽.

바로 지금과 같은 때 말이다. 음……, 뭔가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 보인다.

“흐음…….”

진지하게 나오는데 그래도 마냥 웃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지금이라도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사실…….”

“사실?”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니까 일단 말리고 본 거에요. 히히…….”

내가 말하고도 왠지 모르게 레그나에게 미안해져서 목소리가 절로 기어들어갔다.

내 말을 끝으로 우리의 대화는 단절된 듯 했고, 나는 다시 성당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

박수를 쩍, 치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불현 듯 번쩍 하고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레그나는 나의 이런 행동에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 성당에 있는 여벌의 신부복을 입는 거에요!”

죽어간 고인을 욕보이지 않게, 고(故)신부님의 옷이 아닌 의상으로서 보관해오던 여벌의 신부복이 아직 있을 것이다. 그걸 입으면 된다.

“괜찮겠나, 시스터? 지인의 죽음은 쉽게 가라앉는 성질의 것이 아닐 텐데.”

“신부님이 하늘나라로 가신 것과는 별개의 일이에요. 그리고 이 자리에 내가 아닌 신부님이 있었다 해도 나와 같은 말을 하셨을 것이라 믿어요. 그분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홀로 편히 지내시지 않고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사실 테니까. 난 다만 그 정신을 이어간 것뿐이죠. 그분을 욕되게 하지 않으니까. 난 망설이지 않아요.”

말을 마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신부님의 유언은 듣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보아왔던 신부님의 마음은 이해 할 수 있다. 분명 죽은 자 보다는 산자를 위해서 노력하라고, 살아있었더라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잠시 후, 레그나는 내가 말해준 곳에서 신부복을 찾아 입고서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사이에 나도 새로운 수녀 복으로 갈아입었기에 우리 둘의 모습은 청초하게 느껴졌다.

“무척이나 잘 어울리네요.”

긴 금발을 정리하지 못해 삐죽삐죽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산만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야말로 ‘신부’ 같다. 아마 서양에서 가톨릭교가 생겨났기 때문에 신부복은 서양인에게 더 어울리는 옷인가 보다. 거기다 그는 상상 속에서나 있을법한 뱀파이어이자 천사이고. 그 상상 속에서 꿈꾸던 모습게 걸맞게 외모 또한 수려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아마도 신부복은 물론 무슨 옷이든지 어울릴 것이다.

“고맙다.”

딱히 어색한 것도 없이 오히려 외국에서 온 선교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도 그걸 알까. 애초에 쑥스럽다느니 그런 감정은 없을 것만 같은 사람이라 반응이 없어도 그다지 감흥이 없다.

“수행 수녀와, 떠돌이 신부라는 설정이면 어딜 가든 우리의 여행이 방해 받진 않겠죠?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렇게 되네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수녀와 신부. 어딜 가든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어울림이다. 다만 찾아보기가 힘들 뿐. 오히려 종교인의 모습으로서 활동한다면 여행에 많은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렇겠지. 이 시대의 가톨릭이라면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는 입히지 않을 것 같다.”

일순간 말하는 레그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먼저 말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에게 있어서 아픈 이야기인 듯하다.

“자, 이제 준비도 끝냈겠다. 출발……, 전에 잠시.”

분위기가 잔잔하게 흘러가는가 싶었는데 마지막에 했던 그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마침 짐을 다 챙겼기에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리고 옷깃을 여미고, 머리도 다시 한 번 단장해서 전신 거울이 있는 방의 구석으로 가서 한 번 온 몸을 빙 둘러보았다.

“괜찮은 것 같네.”

음, 음, 하고 스스로 좋아했다. 항상 깨끗하게 정돈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선다는 건 종교인으로서의 예의이자 자긍심이다.

이렇게 마지막 준비까지 마쳤다.

07:20

시계를 보니 그렇게 많은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탈 없는, 평범한 구도자를 향한 길을 걷고 있던 수녀에 지나지 않았는데. 단 하룻밤 사이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어찌 보면 기밀 관리원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불과 몇 개월이지만 익숙했던 방인데, 하루도 채 고민하지 않고 떠날 결심을 했다. 섣부른 판단인 것 같기도 하고, 귀가 얇아서 누군가의 말에 혹한 것 같기도 하지만 이미 결정내린 사항에 대해 번복 할 수는 없다.

“가요.”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잡고 뒤돌아서 문 쪽으로 나가려는데 레그나가 뒤에서 내 손목을 낚아챘다. 궁금해서 그를 빤히 쳐다봤는데.

“가기 전에 잠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멈춰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안 그는 손목을 놓았다.

이제는 나가야 할 시간이다. 평일에도 찾아오는 신자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야밤이거나 이른 아침뿐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인지는 그도 잘 알 텐데. 그런데 그는 서두르지 않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인기척이라면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썼다면 미리 신경을 썼어야지. 너무 둔한 것 아닌가? 이 상황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 난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

마치 내 생각을 읽고 답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도시에서부터 시가전을 벌이며, 성당과 야산의 일부를 몽땅 폐허로 만들었는데. 주민들이 단 한명도 총소리를 못 듣고, 난투극을 못 봤다는 건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나? 한명이라도 봤다면 이미 주민신고로 인해 여기는 시끌벅적 했을 텐데 말이지. 이 지역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어지럽혀져 있다면 분명 신고를 했어야 정상이지. 안 그러나? 너도 사건 현장에 있었지만 위화감은 들었을 텐데. 분명.”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멀리서 보았을 땐 총소리가 나는 것도 모를 만큼 그 소리가 작았고. 가까이에서 있어도 원래는 큰 소리다, 라고 생각나게 할 뿐 그다지 큰 굉음은 아니었다. 그보다 텔레비전의 음향을 낮춘 것 같이 전체적으로 소리가 작았다, 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그것도 그러네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옳은 말만 구구절절 하는 레그나는 빈틈이 없는 인간이다.

“이유로는 인식장애와 물리기란 마법을 광역범위로 펼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하니 상처도 쉽게 낫질 않는 게 흠이긴 하지만. 적의 이목을 속일 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어제 보았던 것에 비하면 가히 놀라울 정도의 회복을 한 것 같은데. 그는 그게 아니란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진탕되어서 엉망이라는 것인가.

“그래서 뭘 하려고 날 붙잡은 거예요.”

이유는 알겠는데, 도대체 뭘 하려고 날 붙잡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건 걸어가면서 말해도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미리 가까운 소방서에 연락을 하기 위함이지.”

“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신부님이 돌아가셨으니 앰뷸런스를 부르는 건 이해가 되겠지만, 그가 내뱉은 말의 느낌은 불이 났으니 소방차를 부르자는 것에 더 가까웠다.

‘설마 방화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아까는 옷을 훔쳐오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지금은 비도덕적 행위를 일부러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레그나의 이성적인 모습이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여길 떠나는 순간 이곳은 잿더미로 변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지.”

아무리 천사에 가까운 사람에다가 냉철하다고 생각하지만 미래를 내다본다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만큼 나도 녹록치는 않다.

“천사는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는가 보죠?”

농담이라 해도 불쾌할 말을 진지하게 하다니. 덕분에 심사가 뒤틀려 입으로 표출하고 말았다.

이곳이 어떤 곳인데.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내 보금자리였고, 신부님의 평생이 담긴 성당이었다. 마지막에 와서 내 주변에서는 일어나리라 감히 상상도 못한 총격전으로 신부님은 뜻하지 않게 안락에 드셨고, 그나마 이곳 성당에서 눈을 감으셨다는 것이 최대한의 위안인데.

그런데 성당이 화제 수준이 아니라 잿더미로 변할 정도의 화마에 휩싸인다고 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아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미래는 볼 수 없다. 다만 나와 이렇게 마주했던 인간들은 열이면 열. 예외 없이 내가 말한 방법을 사용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란 것을 추측할 뿐이지. 난 정말로 과거를 봤을 뿐 미래는 볼 수 없다. 그래도 너무 똑같은 레퍼토리가 수없이 반복된다면 뒷내용 정도쯤이야 미리 생각할 수 있을 정도는 머리는 가지고 있지. 단순한 논리야. 그래, 이정도면 대답으로서 충분한가?”

그의 말뜻은 충분이 이해했다. 우린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그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더 이상 토라질 순 없었다.

재미있는 건 그에 대해선 하나도 아는 것이 없으니, 그가 하는 말들을 하나씩 곱씹어 보면 그의 과거에 잠깐씩 다가 설 수 있는데. 이번에만 하더라도 이런 목숨 건 사투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한두 번 가지고 이런 추측은 할 수 없을 테니, 젊어 보이는 사람이 너무도 험난하게 살아온 것 같다.

‘가만, 레그나랑 동행하면 나도 사건에 충분히 휩쓸릴 수 있단 이야긴데…….’

괜히 같이 가자고 했나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일수록 구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서기도 하지만.

“당신의 과거까지 내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픈 기억 생각나게 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나보다 별로 나이도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어릴 적부터 강하게 자랐나 봐요.”

사과와 질문을 동시에 퍼부었다.

“그다지. 아픈 기억들 축에도 들지 않아. 이런 건 익숙해졌으니까. 상처 받은 것들은 따로 있지. 따로……. 그나저나 내 나이를 몇 살로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음……. 글쎄요. 서른 살을 조금 넘기지 않았나, 싶은데. 서양인은 잘 모르겠네요. 그냥 감이죠, 감.”

외국인을 매일 같이 보면 짐작이라도 하겠지만, 여긴 대한민국. 아직 자국인원이 압도적인 비율의 나라다.

“분명 서른 살은 넘었지. 그건 확실하다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지. 난 나이를 잊고 살았으니 정확히 몇 살인지 모른다는 거다.”

“네?”

뒤통수를 강하게 한 대 맞은 느낌이다.

뭔가 자꾸 똑같은 레퍼토리로 말을 되받아 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이천년은 넘었지 않나 싶다. 나 대신에 나이를 계산해주는 달력이 있으니, 추측이긴 하다만. 그리스정교는 내 인간이었던 생에선 있지도 않았으니까.”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천년은 뉘 집 이름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멍한 내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영원을 걷는 자에겐 나이 따위 별로 흥밋거리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얼른 연락을 취하지 않겠는가? 날이 밝아올수록 나의 마법 지배력은 약해진다. 이곳을 보려는 의지가 많아질수록 마법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지지. 서둘러라.”

말투는 여전히 느긋하지만 분위기란 것이 있어 그가 은연중에 초조하단 걸 느낄 수 있었다.

“알았어요. 잠시 만요. 여긴 복도에 전화가 있으니까 일단 방에선 나가야 해요. 그런데 무슨 말로 오게 만들죠? 불이 나겠지만 아직은 아닌데…….”

미래를 볼 수 없고, 과거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그의 말은 허황된 거짓말이다. 직접 듣는 나도 아직까지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데, 내가 전해주어야 할 사람은 오죽할까.

‘하긴 그런 장난 전화는 수없이 들어봤을 곳이니. 그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후────.”

한숨을 쉬면 복이 나간다던데. 오늘따라 한숨이 잦은 것 같다.

“안내해 준다면, 내가 전화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여행용 가방을 끌고서 나섰다. 레그나는 신부복을 입고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라다녔다.

꾹, 꾹, 꾹.

전화를 걸고 바로 레그나에게 건넸다.

“성당에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들 힘으로는 도무지 진압이 되지 않습니다. 조속한 조치 부탁드립니다.”

불난 곳에서 신고 전화가 걸려오는데. 신고자의 목소리가 이러하면 누가 믿어줄까. 너무나 진지한 목소리라 그 진지함에서 믿어주려나 모르겠다.

“가자. 소방서에서 대처가 너무 빠르면 그것도 곤란해지니까. 서둘러라.”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내 가방을 가볍게 쥐고, 반대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달렸다.

“우와앗, 저기 잠시, 잠시! 천천히 좀 가요!”

분명 그는 내 말을 들었겠지만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억지로 이끌리고, 원하지도 않은 전력질주를 한 탓에 도통 호흡이 진정되지 않는다. 머리로부터의 끝없는 산소요구에 몸은 절로 기역자로 구부러져 숨을 거칠게 들이마셨다.

“왜 갑자기 뛰어서 사람 힘들게 하는 거예요. 미리 말이라도 해주면 내 발로 뛰었을 텐데───.”

서두르란 말만 여러 번 했지, 이렇게 급하리란 건 상상도 못했다. 침착한 어조 안에서 얼마만큼 급한 일인지 어떻게 파악하란 말인가.

“투덜거려도 과거는 변하지 않아. 차라리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지. 그나저나 소리가 들리는가? 나에겐 두 가지의 소리가 똑똑히 들리는데. 그대는 아무렇지도 않나보군.”

어느 정도 숨이 가라앉고 그의 말대로 주위로 귀 기울여 보았다.

딱───, 따닥────, 화아악───.

위이잉───, 위이잉───.

“어?”

뛰어왔던 방향으로부터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봐라.”

바로 몸을 돌렸다.

“하……, 이럴 수가. 하, 하하하…….”

허탈하기만 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레그나의 말이 정말로 눈앞에서 실현되었다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몇 개월 동안 생활했던 소중한 거처가 시뻘건 화마에 휩쓸려 하나씩 무너지고 쓰러지는 걸 보고 있는 건 그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아리따운 숙녀분이 오셨네.’

처음 이곳 성당에 들어왔던 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받아준 신부님.

‘우리 성당에 꽃이 피어서 날마다 밝구나.’

화단에 물을 뿌리며 홀로 즐거워하시던 신부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든지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하세요. 난 그걸로 충분하답니다.’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는, 짧지만 소중한 추억들────.

이제는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단 몇 분 만에 일어난 화제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용암 같은 불꽃들. 그리고 그 속에서 메아리치는 사이렌 소리.

너무나 조용했던 아침이 소동의 물결을 탔다.

그렇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찰나,

스윽.

레그나가 재빨리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덕분에 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대신에 지금까지 북받쳐 쏟아지지 않은 것이 신기한 눈물들이 지금에서야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레그나가 보이지 않는 그의 어깨 너머로.

주르륵, 주르륵.

나의 눈물범벅된 얼굴을 가려주기 위해서 천사는, 자그마한 행동 하나로 그렇게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있었다.

“울 수 있을 때 울어라. 살아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니까. 그리고 울음이 그치거든, 마음이 진정되거든, 그때 이곳을 떠나도록 하자. 미련을 남기고 보내기엔 우리는 그다지 급하지 않은 여행자들이니까.”

내가 우는 것을 심장으로 느꼈는지, 등을 토닥이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by 화희 | 2011/10/15 13:40 | Vampire & Sister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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